
사진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가재울 마을 하계동 산 12번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한글 비인 보물 제1524호 ‘이윤탁 한글 영비’가 보존되어오고 있습니다. 한글 영비의 주인공 이윤탁은 종9품 승문원 부정자를 지낸 분인데요~ 조선 중종 때의 문인 이문건(당대의 명필, 임금인 중종의 시호를 쓸 정도의 무게 있는 서예가인 좌부승지의 통정대부)이 돌아가신 아버지 이윤탁과 어머니 고령신씨의 합장묘 앞에 스스로 글을 써서 새긴 묘갈로, 조선시대 세워진 국내 유일의 한글 비석입니다. ‘한글고비’라는 이름으로 1974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7년 9월 18일 보물 제1524호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비석에는 앞면과 뒷면의 일반적 비문 외에 동쪽 측면에 불인갈, 서쪽에 영비라는 제목 아래 한자와 한글로 특이한 추기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의 앞면에는 묘주의 이름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고비묘갈음지’라는 제목 아래 묘주의 일대기가 적혀있습니다. 비석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한글과 한문으로 묘비에 묘의 훼손을 경계하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문건의 지극한 효심을 표현한 것으로, 후세에 누가 이 비석과 묘를 해칠 것을 염려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비석의 특징적 가치는 비석 왼쪽에 새겨진 한글 경고문 입니다. 여기에는 이 평범한 비갈을 영비가 되게 하고 문화재로 지정되게 한 한글 추기가 있는데요~ '영비' 두 자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쓰여 있습니다. 글자는 모두 30자이며, 이 서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형의 성격을 지닙니다.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하지만 이 ‘한글영비’는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중종 31년(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가 됩니다. '한글 영비'짧은 문장이지만 언해문이 아닌 원 국문 문장으로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이며, 한글이 한문 번역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증명하는 것 입니다.
내용은 신령한 비석이라는 제목 아래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이것은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라고 당시의 훈민정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한문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한글을 읽을 수 있어 혹시라도 이 비를 훼손하지 않도록 일종의 경고문으로 쓴 것입니다. 그 속에 깃든 효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비문에 힘입 듯 5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이윤탁 한글 영비'는 잘 보전되고 있으며, 실제로 주민들에 의해 신물로 여겨져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까지 주민들은 이 비석에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렸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도서 <서울 답사여행길라잡이1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145&cid=42840&categoryId=42848
이윤탁 한글 영비는 특히 훈민정음 창제 이래 최초의 한글이 새겨진 금석물 석비로서,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조선 500년 동안 유일무이한 현존 최고의 희귀한 금석문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또한 16세기 한글 고어의 모습을 보여주는 국어학의 학술자료로서, 훈민정음 창제 초유의 한글 서예연구자료로 매우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근대 이전의 비석 가운데 한글이 새겨진 것으로는 지금까지 산불됴심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6호)·인흥군 이영 묘역 내 묘표(비지정)·이윤탁 한글 영비 등 모두 3건이 남아 있지만 그 가운데 '이윤탁 한글 영비'는 한글이 새겨진 우리나라 최초의 석비라는 점에서 특히 역사적 가치가 높고, 국어사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습니다.

사진 출처: 도서 <서울 답사여행길라잡이1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57145&cid=42840&categoryId=42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