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안산은 예로부터 명당의 기운을 갖고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다양한 계층의 이들이 마지막 안식처로 찾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초안산은 '내시네 산'으로 불리었지만 내시의 무덤은 묘비와 기록이 남아 있는 승극철을 제외하고는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묘비를 세우지 않거나, 비문을 새기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사를 거치며 그들의 자손들에 의해 이장되고, 삶이 지워졌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초반만해도 청백아파트 주변 일대에 약 50여기의 내시 묘가 있었다고 합니다.
초안산 '녹천정' 정자 아래에는 두 개의 봉분 앞에 비대위에 비문이 새겨진 비신이 서있습니다. 바로 그 곳이 승극철 부부의 묘 입니다. 비석전면에 '통훈대부행내시부상세 승공극철 양위지묘'라는 글씨가 뚜렷합니다. 이는 승극철이 내시부 정6품 상세직에 있었으며 '통훈대부'라는 정3품 품계를 받았던 인물임을 알려줍니다. 또한, 승극철은 숙종 때 인물로 '승정원일기' 에도 시상 받는 내역이 3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일처리를 잘하는 인정받는 신하였다고 합니다. 이 곳 묘역에서는 2개의 봉분이 인상적입니다. 비석에 나와 있는 '양위지묘'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인과 함께 쌍분으로 합장했음을 의미하며, 이로써 내시도 결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승극철은 결혼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양자로 들인 아들도 있었습니다. 아들과 손자는 승극철 이후 가계를 이어갔는데, 역대 조선왕조에서 가장 번성했던 내시가계의 일원 이었다고 합니다. 승극철의 가계는 한 계파의 인물이 수백 명에 달했고, 이름난 내시문중이었으며, 임금의 총애를 받는 명문 집안이었습니다. 가계의 시조는 승극철의 조부이기도 한 '연양군 김계한'으로, '연양군파가승록'에 의하면 선조조에 상선으로 호성공신이었습니다. 승극철은 '연양군 김계한'의 맏손자라고 입니다. 이들 연양군 파는 선조 때부터 철종 연간에 이르기까지 초안산 묘역을 선산으로 대를 이어 이곳에 묻혔다고 합니다.
매년 봄이면 흰색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는 아까시 나무의 짙은 향기가 승극철 부부묘를 찾아가는 길 전체에 드리워집니다. 이 모습은 마치 부부의 깊은 사랑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초안산 동남쪽 정산 부근을 가다보면 '녹천정'이라는 정자 아래에서 승극철 부부 묘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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